지리한 장마가 시작되었다. 그래도 가끔은 햇살을 느낄 수 있게 많은 날이 점점이 섞여 있어 지내기에는 고만 고만하다. 헌데, 올 초부터 들려오는 갖가지 소식이 영 계절을 느끼기에는 사치스런 기분이 들게 한다. 정치 얘기야 우리 촌 무지렁이에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, 어이없는 지하철 참사가 많은 이의 가슴에 슬픔과 분노를 켜켜이 쌓아 놓더니만 오만한 제국주의의 발로인지 극단적인 자국이기주의 인지는 몰라도 어린애 팔목 비틀 듯 한 나라를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선 정의의 승리라고 기치를 높이는 꼴이 영 속을 불편하게 하더니만, 종내는 별 거지같은 질병이 창궐하여 간만에 머리 식히려 나들이 해 보려는 주위 사람들 발을 묶어, 울화 만 키워 놓았다.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이라, 줄줄이 이어지는 파업, 농성... 연일 신문과 방송에선 I.M.F. 이후 최대의 불경기라고 떠들어 대지, 이건 정신 올바른 사람도 온전하기가 힘드는 세상이라 할 만 하다. 가뜩이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으려고 이리 저리 골몰하는 선․후배 동료 원장들의 몸부림이 처절하다 못해 안타까운 마당에 경기란 놈 마저 우리 발목을 옥죄고 있으니 이래저래 어려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. 허나, 세상일이 언제 우리 뜻대로만 움직여준 적이 언제 있었던가? 오히려 이럴 때 그간 못 읽었던 책도 읽어보고, 마음도 좀 비워 고승까지는 아니라도 행자 흉내라도 내봄직하고, 그간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 연락이라도 해봄직 하다. 할 일없이 걱정한다고 세상사 내 뜻대로 풀릴 것도 아니고, 오히려 알찬 석류 속 마냥 이때 내실이나 단단히 하고 볼일이다. 부언 하자면, 요즘 난 주위 사람들에게 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라고 어줍잖은 충고를 가끔 한다. 전문 서적이든 베스트 셀러든 일단 많이 읽고 가끔 어딘가에 글을 써내기도 하고,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도 꽤 중요하다고... 물론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도 빠져서는 안될 일이고, 스스로 즐길 줄 아는 취미 활동도 하나쯤은 꼭 가지라고. 장마가 끝이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더위가 득달같이 밀어닥칠 거다.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데 나는 늘 제자리에서 맴 만 돌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? 오늘 저녁은 어느 재즈 카페에서 아슴히 떠오르는 옛 연인의 환영을 안주 삼아 벗해 볼까나... 끝으로 진료에 지친 선생님들의 눈을 잠시나마 難說로 괴롭혀 드린 점에 깊은 용서를 드립니다. 선생님들의 건승을 기원 드립니다. 3003년 7월 초